1. 강박장애를 가지고 있던 착한 후배
군대를 다녀와 복학한 대학에서 한 후배를 만났습니다. 컴퓨터를 잘 다루지 못해 늘 종이에 손으로 눌러 쓴 리포트를 제출하는 유일한 친구였으며, 동료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어쩌다 술에 취하면 어머니랑 단둘이 살고 있다는 얘기며, 좋아하는 여자 후배가 있는데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잘 씻지도 않고 거의 매일 똑같은 후줄근한 옷만 걸치고 다녔습니다.
그 친구는 강의를 같이 듣는 과후배에다 고등학교 동문 후배이기도 했기에 자주 어울렸습니다. 어느 날 그 친구가 자기는 강박증을 앓고 있으며 정신과 약을 먹은 지도 한참이나 됐다고 얘기를 하더라고요. 입에서 냄새가 난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루 종일 수십 번이나 이를 닦기도 했다는 식으로 자신을 설명하는데, 약을 먹고 난 후 조금 나아지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강박증이 뭔지도 잘 모르는 저는 그 친구의 의지박약을 꾸짖었습니다. 왜 약에 의지하냐, 그냥 네 생각과 행동을 바꿔라라는 아무 실효성도 없는 충고를 쏟아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멀어진 후 소식은 간간히 들었는데, 교육을 갔을 때 딱 한 번 그 친구를 만났습니다. 지금도 여전하더군요. 결혼은 했지만 아내랑 아들은 멀리 강원도에 살고 있고, 자기는 아직도 어머니랑 단둘이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공무원이 되었지만 대민 업무는 잘하지 못해 눈치를 보며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는 이야기도 들었고요.
안타깝고 부끄러웠습니다. 저는 한 번도 그 후배를 진정으로 이해하려 노력한 적도 없고, 강박장애에 대해 알아보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저의 인생 영화 중 하나인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서 잭 니콜슨이 연기한 주인공 멜빈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말입니다.
2. 강박장애,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주인공 멜빈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주인공 멜빈은 로맨스 소설 작가입니다. 배배 꼬이고 뒤틀린 성격을 가진 사람을 잭 니콜슨이 연기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면박을 주거나 상처를 주는 말을 대수롭지 않게 뱉어내기 일쑤입니다. 오직 짜증과 분노만 가지고 있어 공격성만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길을 걸을 때면 보도블록의 틈을 절대 밟지 않고, 다른 사람과 스치기라도 하면 큰일 날 것처럼 조심조심 다닙니다.
멜빈은 단골 식당의 종업원인 캐롤과 사귀게 됩니다. 어느 날 데이트를 위해 캐롤과 같이 간 식당은 정장을 입어야만 하는 드레스 코드가 있는 고급 식당이었습니다. 어울리지 않게 대충 옷을 입고 간 멜빈에게 웨이터는 정장을 빌려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멜빈은 남이 입은 옷은 입을 수 없다며 짜증과 화를 냅니다.
멜빈이 보이는 이러한 행동은 강박장애 환자들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증상이라고 합니다. 강박장애의 증상은 크게 강박사고와 강박행동 이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강박사고는 특정한 생각이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맴도는 증상이고, 강박행동은 특정한 행동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증상입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처음에 말한 그 후배는 이 두 가지 증상을 모두 보였던 것 같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이 이러한 강박 증세를 보이긴 합니다. 그중에서 강박사고나 강박행동으로 인해 멜빈처럼 일상생활에 상당한 지장이 있는 사람을 강박장애로 진단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강박장애 환자는 국민 중 약 1.9 퍼센트 정도라고 합니다.
멜빈은 매우 완고하고 공격적이어서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으로 영화에서 그려집니다. 그러나 멜빈처럼 강박장애를 가진 사람의 내면은 오히려 정반대라고 합니다. 그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불안하고 두려운 감정이 깔려 있기 때문에 그러한 행동을 보이는 것인데요. 보도블록의 틈을 밟으면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고, 다른 사람의 옷을 입으면 병에 걸릴까 봐 불안한 것이기에 멜빈은 그렇게 행동한 것입니다.
3. 멜빈, 사랑으로 강박장애를 극복하다
결벽증과 강박장애를 가지고 있어 뭐 하나 괜찮아 구석이 없어 보이는 멜빈은 캐롤을 만나고 그녀를 좋아하면서 변하기 시작합니다. 이기적이기만 했던 멜빈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심리적, 물리적 공간을 내어주고 이타적인 행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나를 더 좋은 남자가 되고 싶게 합니다.'는 멜빈이 캐롤에게 속삭인 최고의 사랑의 밀어이며 이 영화의 명대사로 두고두고 회자됩니다. 저 역시 친한 친구나 아내에게 여러 번 써먹기도 했답니다. 더 좋은 남자가 되기 위해 멜빈이 결심하고 한 행동은 지금까지 멀리했던 정신과 약을 먹기 시작한 것입니다. 약을 먹기 시작하면서 멜빈은 달라질 수 있었던 것일까요?
요즘 학교 현장에는 ADHD 증세를 보이는 학생들이 눈에 띄게 늘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치료약을 먹이는 것을 주저합니다. 혹시나 약물 중독은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을 호소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꾸만 이상 행동을 보이다가 점차 친구들 사이에서 고립되는 일도 일어납니다. 같은 반에서 공부를 하는 친구들도 힘들고 수업을 자꾸 방해받는 선생님도 무척 힘이 듭니다. 그러나 정작 가장 큰 피해자는 ADHD 증세를 가진 그 친구가 아닐까요?
대학 때 한 교수님은 ADHD 증상은 주로 어린 시기에만 나타나며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진다면서, 아무 부작용이 없는 것으로 밝혀진 ADHD 치료약을 할 수만 있다면 수돗물에 타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정신과 약을 먹는다고 꾸짖는 제가 다시 떠오릅니다. 의지와 노력으로 모든 것을 극복할 수는 있지만 그럴 수 없는 사람도 있다는 것. 그리고 약물의 도움을 받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오히려 응원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여담> 장애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 두 편을 더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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